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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자기 통제: 나 홀로 마라톤에서 느낀 것들

by 쓸모쟁이 2024. 2. 8.

기다리던 주말아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딸이 놀러 가고 싶다고 하는데 주말 시간이 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다른 계획 없어서 시간 돼요” 

 

가족과 함께라면가족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시간을 내야지라는 생각이 언제부터인가 내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퇴근 후 가족과 함께할 즐거운 마음에 여행할 만한 곳에 대해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습니다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곳과 맛집도 찾아보았습니다딸은 맛집이 있으면 좋아하는 것 같아서였습니다마음에 드는 몇몇 코스는 자료 캡처를 해 놓기도 했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출근한 금요일 아침카톡이 울렸습니다

아빠우리 학년 확진자 나옴

전체 검사받아야겠네? 

오후에 받으러 간디야

그럼 오늘 여기 못 오겠네!”

....”(우아와 아앙눈물이 쏟아지는 이모티콘과 함께)

얼마 후 아내에게서도 전화가 왔습니다딸의 학교에서 확진자가 나왔다며 못 가겠다고 했습니다 

    


 가족들이 못 오는데 내일은 뭐 할까?’ 

풍경이 좋고 책이 있는 카페에서 독서를 할까아니면 혼자서라도 여행을아니면 누군가와 연락해서 만날까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결정을 못 내리고 잠이 들었습니다   

 

마라톤

 다음날 새벽기도를 하고 침대에 누웠는데 잠깐 떠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2주 후에 계획했던 것낙동강변에서의 30km 달리기였습니다이것을 오늘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1km 하프마라톤 완주를 한 지도 1달이 넘었습니다그 후 30km 완주를 위한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러운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물론 20km는 언제든지 완주할 수 있는 능력은 갖고 있었습니다. 3km, 5km를 지속적으로 달렸기 때문이지요     

 

 그날은 날씨도 좋았고단풍나무와 핑크 뮬리 등 아름다운 환경을 생각하니 뛰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강해졌습니다핫브레이크 3물 500ml 2병을 준비해서 낙동강변으로 출발했습니다강변 주차장에 도착해서 핫브레이크 2물 1병과 스마트폰을 휴대 주머니에 넣고 허리에 찼습니다지난번에 뛰었던 21km 하프코스를 왕복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준비운동을 했습니다시속 10km 속도로 안정된 호흡을 유지하며 잘 뛰었습니다     

 

 30km 조금 못 미쳐 시선을 5m 앞 땅에 두고 뛰는데 갑자기 맞은편에서 오던 할아버지께서 파이팅” 하고 외치는 바람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오직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며 뛰어가다가 갑자기 들린 소리에 얼떨결에 파이팅으로 답하였습니다뛰는 사람이 뛰는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일까걷는 사람과 자전거 타는 사람들을 수없이 지나왔지만 각자의 길을 묵묵히 갈 뿐이었습니다그런데 그 할아버지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복장도 뛰는 모습도 예사롭지 않아 보였습니다. ‘나도 저 나이가 되어도 저렇게 뛸 수 있을까?’ 짧은 물음을 던지며 목표를 향해 계속 뛰어갔습니다     

 

 점점 속도는 떨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1km를 5분대로 뛰다가 이제는 7분 대가 되었습니다그래도 오늘 목표인 30km는 완주를 했습니다비록 속도는 떨어져 가지만 아직 힘과 의지는 있고차를 주차했던 장소까지는 4km 정도 더 남은 듯했습니다그래서 어차피 더 가야 하니 그렇다면 풀코스를 도전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그래서 계속 뛰었죠. 33km 지점에 이르니 양다리의 느낌이 이상했습니다. ‘스르르’ 무언가 장딴지부터 허벅지로 올라오고 있는 느낌. ‘쥐가 내리려나 보다쥐 내리면 끝인데.’ 물론오늘의 30km는 달성했으니여기서 멈춰도 되었습니다그런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지금부터는 위기관리다.’ 더 이상 쥐가 나지 않게 일단 걸었습니다이때부터 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뛰다가 걷다가를 반복했습니다어느 순간에는 걷는데 졸리기까지 했습니다포기하고 싶다는 생각도 여러 번 들었죠준비해 갔던 물과 핫브레이크도 모두 떨어졌습니다더 이상의 보급 대책이 없는 가운데 주차장에 있는 차까지 뛰어가야 했어요차에 있는 예비 핫브레이크 1개와 물 1병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힘듦에 대한 감정을 다스리며 천천히 주차장까지 뛰었습니다드디어 차량 문을 열고 물병을 꺼내서 물을 마시는데 얼마나 맛있던지그 맛을 글로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네가 이 맛을 알아?” 이 질문이 오히려 모든 감정과 맛을 포함하고 있지 않을 듯싶네요휴대 주머니에 있는 빈 물병과 교체를 하고 남은 핫브레이크를 한입 물어뜯어 오물오물하는데 꿀맛이었습니다이내 힘을 내서 다시 뛰기 시작했어요  

   

 이제 남은 거리는 3km. 평소 이 거리는 자신 있는 거리인데 지금의 3km는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심적 갈등이 존재했습니다그래서 남은 코스는 나에게 힘을 줄 수 있는 환경으로 바꾸고 싶었어요나 홀로 마라톤의 장점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코스를 조정할 수 있다는 것나에게 맞는 코스로 재설계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나를 응원하는 사람들은 아니지만사람들이 많이 있는 주변을 뛰면서 그들을 구경하며 뛰기로 했어요핑크 뮬리 공원에서 사진 찍는 사람들이 있는 곳게이트볼 대회가 열리고 있는 곳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들이 있는 곳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나의 남은 구간의 응원부대가 되어 줄 것입니다완주를 얼마 앞두고 응원단이 생긴 것입니다힘이 났죠     

 

 핫브레이크 남은 조각을 입에 물고 당분을 섭취하며 응원단 옆을 뛰었습니다웃고 즐기는 그들의 모습이 나를 응원해 주는 듯 보였죠그들은 그들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인데 나는 힘이 생기는 것 같았습니다롤러스케이트를 가르치는 강사의 소리가 들려올 때는 마치 나에게 코치하는 소리처럼 들렸어요. “천천히집중해중심 잡아야지     

 

 어느덧스마트폰 달리기 앱에서 42km 도착 음성이 들려왔어요남은 거리 195m. 스마트폰을 휴대 주머니에서 꺼내 들었습니다남은 거리가 줄어드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 힘을 냈어요. ‘조금만다 왔다잘했다마지막 10m. 끝이다.’ 이 말들이 마지막 순간을 함께 했습니다. 30km 연습을 하러 나왔다가 42.195km 완주를 하다니 놀라웠습니다그래서 나 자신에게 선물해 주고 싶었어요핑크 뮬리 공원 옆에서 솜사탕을 팔고 있는 곳으로 걸어갔습니다. 3가지 색상의 솜사탕을 완주 기념 선물로 샀죠그리고 핑크 뮬리 사이에 있는 하얀 계단 앞에 섰습니다. ‘맨 끝 계단에 올라가 멋지게 완주 기념사진을 찍어야지솜사탕을 들고’ 완주 메달 대신 솜사탕이었습니다.

 

 어떤 아주머니께 사진 촬영을 부탁하고 승리의 계단을 올랐습니다한 손은 손가락 V, 한 손에는 솜사탕내 인생의 멋진 포즈가 되었습니다꼭 한 번은 해보고 싶었던 마라톤 풀코스공식 대회는 아니었지만더 큰 보람이었어요     

 

 2회 나 홀로 마라톤 대회’(2021. 10. 30) 왜 제2회냐고 물으면1회는 금강 자전거길에서 하프코스로 뛰었었기 때문입니다

나 홀로 마라톤은 우선 자기 통제가 잘 되어야 해요페이스메이커가 되어야 하고의사가 되어야 하고트레이너가 되어야 하죠둘째는 절제와 인내심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몸에 지니고 있는 물과 핫브레이크 등 에너지 보충제만으로 뛰어야 하기 때문이죠꼭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나누어서 마시고 먹어야 합니다셋째심리적신체적자연적 최상의 환경을 선택해서 뛰어야 합니다     

 

 걷는 사람들은 추월하고자전거 타는 사람에게는 추월당하며 뛰었던 시간인생의 압축판이었습니다내 인생의 고비도 33km 지점일까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더 준비해서 사점을 최대한 뒤로 밀어내야겠습니다. 35km, 38km, 40km. 그렇게 인생을 보다 더 안정적이고 도전적이며 아름답게 만들어가야겠습니다나 홀로 마라톤은 계속됩니다

 

 이렇게 마라톤을 했다는 이야기를 하니 듣는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어요. ‘대단하다알았으면 함께 뛰었을 텐데혼자 뛰다가 큰일 난다다음에는 대회에 나가 뛰길....’ 이런 다양한 반응에 그 사람들의 나를 향한 마음이 느껴졌습니다각자의 마음으로 반응해 주니 고마운 일이었습니다정식 대회에 나가면 그 분위기는 또 다를 겁니다주변 분위기에 심취해서 더 잘 뛸 수도 있고아니면 욕심에 걸려 넘어져 중도 포기할 수도 있겠죠알 수 없는 일이지만.     


 내가 나 홀로 마라톤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나 스스로 마라톤 코스를 선정하고물과 먹을 것을 준비하고나만의 페이스로 뛸 수 있습니다주변에서 응원해 주면 좋고없어도 상관없어요경쟁하지 않아도 되죠때론 뒤따라오는 사람앞에 뛰는 사람마주 오는 사람걷는 사람자전거 타는 사람 모두가 내가 뛰는 코스에서 만나는 사람들이지만나의 경쟁자는 아니에요각자의 길을 갈 뿐입니다나의 경쟁자는 오직 나 자신뿐이죠. 내가 정한 목표라는 꿈을 향해 내 보폭으로 내 심장을 느끼며 뛰면 됩니다     

 

 마라톤에서 페이스메이커들을 따라 뛰는 사람들은 초보자들이 대부분입니다자기 페이스 조절이 안되고남의 페이스를 따라 뛰다가 힘들어 포기하는 초보자물론 초보자가 아니어도 경쟁심이 강한 사람은 오버 페이스에 걸려 실패하기도 합니다목표까지 어떻게 뛸 것인가를 고민하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최소의 짐을 챙겨서 자기만의 속도로 뛰면 됩니다중간중간 몸의 변화에 따라 자기 관리를 하며 가면 됩니다물을 마실 때인가허기를 달래고 열량을 보충할 때인가잠시 속도를 늦출 때인가걷지 않으면 안 될 때인가? ‘상황판단-결심-대응의 연속이죠나 홀로 마라톤은 인생 100년의 축소판입니다그래서 뛰어 볼만합니다.